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칠레] 칠레 대통령은 왜 갑자기 동성결혼 법제화를 추진했을까?
    스페인어권/칠레.아르헨티나.우루과이 2022. 3. 1. 02:04

    칠레 정부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사진. 21년 6월 1일 하원에서 연설하는 피녜라 대통령.

    *이 글은 아래의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새로 쓴 글입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동성결혼 의제에 있어 분명한 선을 긋던 칠레 피녜라 대통령이 동성결혼을 법제화할 것이라는 기대는 높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 6월, 대통령이 "동성결혼 법제화를 긴급히 재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작년 12월 9일 칠레에서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상하원 국회를 통과한 동성결혼 법안에 최종 서명하면서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국내 보도를 살펴보면 칠레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다는 짤막한 소식만 전할 뿐, 중남미에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칠레에서 보수적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성취가 이뤄졌는지는 잘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동성애 비범죄화(1999년), 차별금지법(2012년), 시민결합법(2015년) 등 굵직한 의제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도 수많은 성과를 일궈온 칠레의 성소수자 단체들의 지속적이고 단호한 노력이 핵심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점에서 조금 빗겨 가, 피녜라 대통령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AFP에서 수집한 사진. 칠레 동성결혼 법제화 시위 현장.

    칠레에서 동성결혼 법안이 탄력을 받은 건 작년 21년 6월 1일, 피녜라 대통령이 연례 국회 연설에서 “국회에 계류하고 있는 동성결혼 법안을 긴급히 재추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의지를 표명한 때였다. 집권 초기에 “결혼은 남녀의 것”이라고 발언하거나 “국회에 계류하고 있는 법안은 행정부 소관이 아니”라며 소극적 내지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피녜라 대통령이 동성결혼 법제화 추진 의지를 보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칠레의 양대 성소수자 단체 중 하나인 모빌아체(Movilh)의 활동가도 피녜라 대통령의 발표를 두고 “긍정적”이라면서도 “놀랍다”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칠레는 한국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로, 4년제 연임이 불가능한 중임제라는 차이가 있지만 한국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한 나라이다. 때문에 피녜라 대통령의 의지가 동성결혼 법제화를 가능하게 한 중추적인 계기였다는 이야기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이 강력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이 지지부진하게 공회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칠레 대통령의 경우가 어땠는지 간단하게나마 들여다보고 싶었다.


    법제화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인물 사진 Wikicommons에서 수집. 칠레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운동의 경과를 아주 간략하게 표시했다.


    모빌아체를 비롯한 칠레 성소수자 단체들이 동성 커플의 법적 가족구성권을 위해 조직적이고 본격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한 시기는 2010년이다. 2010년 9월,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동성 커플 3쌍이 시내 각지에 있는 시민등록청(관공서) 사무실을 방문해 혼인신고서를 제출한다. 신고서가 반려되자 이 커플들은 모빌아체와 함께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을 거쳐 최종 패소하자 12월에는 미주인권위원회(IACHR)에 이 사건을 제소한다.

    미주인권위원회는 이 소송을 제소에 참여한 3쌍 커플 중 한 명인 페랄타 웨첼 씨의 이름을 따 ‘페랄타 웨첼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웨첼 씨 본인은 사후에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 소송을 “성소수자 공동체의 요구가 (좌파든 우파든)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계기로 봤다.

    법적 가족구성권 투쟁이 본격화된 2010년은 좌파 미첼레트 1기 정부에서 우파 피녜라 1기 정부로 정권이 이행된 시기였다. 피녜라 1기 정부는 성소수자 단체들의 요구를 반영해 시민결합에 관한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이 법안은 임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고 미첼레트 2기 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모빌아체도 미첼레트 2기 정부가 들어선 14년부터 정부, 국회와 가족구성권에 관한 활발한 교섭을 시작해 15년 4월에 시민결합법 법제화 성공, 16년 6월 정부와 동성결혼 법안에 관한 합의안 도출, 17년 9월 동성결혼 법안 국회 상정이라는 성과를 이뤄낸다.

    하지만 미첼레트 2기 정부 종료 직전에 상정된 동성결혼 법안은 결국 임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고 피녜라 2기 정부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 법안은 18년 출범한 피녜라 2기 정부의 부정적인 태도로 인해 국회에 계속 계류하며 오랜 시간 처리되지 못하다가 21년 6월 피녜라 대통령의 깜짝 발표를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부상, 6개월 만에 법률로 제정되었다.


    피녜라 대통령의 갑작스런 법안 재논의 선언


    피녜라 2기 정부는 출범 초기에 동성결혼 법안에 소극적 내지는 부정적이었다. 18년 3월에 출범한 피녜라 2기 정부는 동성결혼 법안에 관한 정부 기조를 ‘적극 추진’에서 ‘진척 상황 모니터링’으로 변경했다. “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으므로 이는 행정부의 소관이 아니며, 또한 동성결혼 법제화가 피녜라 정부의 정책 기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피녜라 정부는 모빌아체 등 성소수자 단체와 미첼레트 2기 정부가 16년 합의한 협약을 이행하지 않고 “정부가 이 협약을 더 이상 이행할 의무가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모빌아체와 미첼레트 2기 정부는 16년 협약을 체결해, 모빌아체가 미주인권위원회에 제기한 대정부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칠레 정부가 동성결혼 법제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던 바 있다. 하지만 피녜라 2기 정부는 집권 직후인 18년 미주인권위원회에 전달한 입장문에서, 정부가 관련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니 소임을 다 했고 그 이상의 의무는 없다고 전했다. 피녜라 대통령 본인도 “결혼은 남녀가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자녀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 말기에 상황이 바뀌었다. 칠레 대통령들은 정례적으로 매년 6월 1일 국회에 나가 국정 보고 겸 연설을 한다. 피녜라 대통령도 21년 6월 1일 어김없이 연설을 진행했는데, 이 연설에는 “국회에 계류 중인 동성혼 법안을 시급성을 가지고 재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소수자 단체에게도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피녜라 대통령은 사후 인터뷰에서 이 계획을 극소수의 각료들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설문 초안에는 이 급작스런 발언이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고 최측근 보좌진과 내각 장관들도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연립여당 내부에서 “사전에 합의된 바가 없었던 발표”라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선임보좌관이었던 크리스티안 라룰레트 씨도 “몰랐다”라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선임보좌관조차 말 그대로 ‘TV를 보고’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있었던 걸까? 속내를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피녜라 대통령에게 변화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치적인 배경 3가지와 개인적인 배경 2가지를 찾아 정리해 보았다.


    하나, 강경 반대파 장관의 실각

    Wikicommons에서 수집한 사진. 안드레스 차드윅 전 장관.

    일각에서는 피녜라 장관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안드레스 차드윅 내무부 장관이 교체된 점을 꼽는다. 차드윅 전 장관은 피녜라 2기 정부에서 18년 3월부터 19년 10월까지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1기 정부에서도 3년 간 장관을 지냈는데, 1기 정부 때에는 시민결합 법안을 추진한 경력도 있다.

    하지만 차드윅 전 장관은 시민결합의 필요성에는 동의했지만 일관되게 ‘결혼’이라는 제도가 동성커플에게 적용되는 것은 강경 반대해왔다. 11년에는 결혼을 남녀 간 관계로 제한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기도 했으며 2기 정부 출범 직후인 18년에는 피녜라 정권이 동성결혼 법제화와 무관하고 “이성 간 결혼을 지지한다”라고 강조했다. 19년에 법안이 재논의되는 기미가 보이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따라서 차드윅 전 장관이 19년 10월 교체된 것이 피녜라 대통령에게 입장 변화의 계기까지는 되지 않아도, 적어도 부담을 덜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칠레에서는 19년 10월 중순 신자유주의 경제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차드윅 장관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0월 말에 경질된다. 게다가 곧이어 하원에 의해 위헌 혐의로 고발당했고, 상원에서는 12월 차드윅 전 장관에게 시위에서 군경이 자행한 인권 침해의 책임을 물어 2024년까지 자격 정지를 선고했다.

    피녜라 대통령이 차드윅 전 장관의 경질 이후에 동성결혼 법안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사례 중 하나로, 경질 1년 뒤인 20년 10월 국무회의에서 국회에 계류 중인 동성결혼 법안을 검토할 것을 요청한 것이 있다. 피녜라 대통령의 ‘깜짝 발표’가 있기 8개월 정도 전이다,


    둘, 게이 보좌진

    Emol에서 수집한 사진. 벤하민 살라스 칸토르 전 보좌관.

    차드윅 전 장관 외에도 피녜라 대통령의 측근 중에 강조할 만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피녜라 대통령의 국제 안보 보좌관 역할을 수행한 벤하민 살라스 칸토르 전 보좌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피녜라 대통령의 ‘깜짝 발표’ 이후 사람들의 이목은 살라스 전 보좌관에게 집중되었는데, 살라스 전 보좌관은 이 ‘깜짝 발표’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살라스 전 보좌관은 피녜라 대통령의 곁에서 동성결혼 법제화를 가장 강력하게 추진했다. 우파적 정견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측근 중에서는 성소수자 이슈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사였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칠레 일간 ‘라테르세라’는 살라스 전 보좌관이 국제적인 압력을 의식해 피녜라 대통령의 결정을 이끌어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살라스 전 보좌관이 동성애자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 본다. ‘깜짝 발표’ 이후 ‘라테르세라’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성결혼은 제가 항상 가지고 있던 신념입니다. 제가 칠레에 살고 있는 동성애자 남성으로서 이 의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 법이 가족(의 역할)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색깔과 무관한 기본적인 원칙을 다루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과거 시민결합 법에 반대표를 던지던 사람들이, 동성결혼 추진을 막아내기 위해 시민결합 법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이건 고통스러웠습니다.

    피녜라 정부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헌법은 우리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며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다고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결혼 법제화가) 피녜라 2기 정부의 공약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녜라 2기 정부가 지켜온 원칙에 부합합니다.”


    셋, 대통령 후보들과 여론의 반응


    피녜라 대통령의 ‘깜짝 발표’가 이뤄진 21년 6월 1일은 피녜라 2기 정부 후반기로, 다음 대권에 도전한 인물들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당시 정치권 내외부의 여론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동성결혼 법제화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점을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우파에서 대권을 노리던 이그나시오 보리오네스 전 재무부 장관과 세바스티안 시첼 전 방코에스타도 국영은행장은 피녜라 대통령의 의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우파 연립여당 내부에서 “상의되지 않은 내용이다”, “동성결혼 법제화가 왜 우선순위를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견도 다분했지만 대권 도전을 노리는 주요 정치인들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깜짝 발표’ 이후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6월 7일 발표된 조사에서는 74%가 동성결혼 법제화에 찬성한다고 나왔고 14일 조사에서는 55.5%가 찬성하다고 조사되었다. 수치가 다소 들쭉날쭉하지만 두 조사 모두에서 찬성 의견이 과반을 넘었다. 모빌아체의 핵심 활동가인 오스카르 레멘테리아 씨도 올해 2월 언론 인터뷰에서, 55%의 유권자들이 동성결혼에 찬성한 것이 대통령의 결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넷, 자녀들의 역할

    El País에서 수집한 사진. 왼쪽부터 크리토발(아들), 세실리아(딸), 세실리아 모렐(어머니), 세바스티안 피녜라(아버지), 마그달레나(딸), 세바스티안(아들).

    정치적인 배경을 넘어 피녜라 대통령에게 ‘개인’으로 다가왔던 계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녜라 대통령 슬하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이에 앞서 ‘피녜라 가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피녜라 대통령이 속한 ‘피녜라 가문’은 칠레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문이다. 피녜라 가문의 인사들은 정·재계 각층에 진출해 있고 특히 정치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피녜라 대통령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토발, 마그달레나, 세실리아, 세바스티안 네 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눈여겨볼 만한 점은 이들 네 명 모두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으로 ‘중도좌파’라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밝혀왔다. 자신들은 중도좌파로 아버지와 여러 점에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특히 임신중절, 동성결혼, 동성부부 입양 등에 대해서 찬성한다고 말이다. 또 4명 중 3명(크리스토발, 마그달레나, 세바스티안)은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래재단’(Fundación Futuro)에서 이사를 맡고 있는데, 18년에는 칠레 전국의 교사를 초청한 토론회를 개최하며 모빌아체 활동가를 초청하기도 했다.

    4명의 자녀 중 동성결혼 의제에서 가장 활발한 의견을 낸 사람은 첫째인 크리스토발 피녜라 씨인 것 같다. 크리스토발 피녜라 씨는 피녜라 1기 정부 극후반인 14년 2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칠레의 ‘새로운 우파’를 만들었다며 그 특징 중 하나로 “동성결혼과 같은 의제를 다룰” 수 있게 된 점을 뽑았다. 또 미첼레트 2기 정부 시기인 17년에는 “동성결혼은 제가 지지하는 의제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버지,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눴었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점도 있었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죠”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이러한 자녀들의 정치적 성향, 그리고 ‘아버지와의 대화’가 피녜라 대통령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피녜라 대통령의 자녀들은 동성결혼 법제화 등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의제에서 계속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라테르세라’는 “피녜라 대통령이 자녀들로부터 자신의 발언이 ‘부당한 차별’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다섯, 대통령 본인의 변화

    '칠레비시온' 인터뷰 영상 캡처.

    피녜라 대통령의 ‘깜짝 발표’가 충격적이었던 만큼 칠레 TV 방송사인 ‘칠레비시온’에서는 발표 바로 다음 날인 6월 2일 피녜라 대통령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앵커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입장을 바꾸게 된 이유가 뭡니까?”. 이 글의 앞선 부분에서 피녜라 대통령이 2기 정부 출범 당시에 했던 발언과 보였던 태도를 보면 이런 의문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피녜라 대통령은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례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는 “(동성 간의 관계는) 애정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좌파, 우파의 문제도 아니고 종교적인 의제도 아닙니다. 종교적인 결혼은 여전히 남녀 사이의 결혼이 되겠지요. 이 문제는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연립여당 내부에서 갈등이 생길 가능성에 대해 질문받자,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있습니다. 제가 이날 연설에서 요청한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제, 즉 자유와 존엄성, 사랑과 애정에 관한 의제를 국회에서 논의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논의 자체를 저지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누구에게도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릴 것을 부탁하지 않았다며 모든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표를 던질 것이고 여당 내부에서도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변화의 속도는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

    AP에서 수집한 사진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대통령의 결정이 칠레 동성결혼 법제화를 비롯한 다양한 성과의 유일한 원인인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 단체를 비롯한 각계각층이 꾸준히 헌신해오며 사회 변화에 큰 공헌을 해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대통령의 의지 표명 후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법안이 처리된 것도 시민사회의 노력과 성과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이 글은 피녜라 대통령을 마냥 추켜세우기 위해 쓰이지도 않았다. 성소수자 의제 외에서의 행보까지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피녜라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에는 비판의 지점도, 부족한 내용도 아주 많다. 하지만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지고 있는 나라에서,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입법을 비롯한 긍정적 사회적 변화가 탄력을 받고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었다.

    이 글에서는 피녜라 대통령의 의중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지만, 바첼레트 정부와 피녜라 정부 모두에서 대통령의 의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모빌아체를 비롯한 성소수자 단체들이 좌파 성향의 바첼레트 정부와 함께 다양한 성과를 이루어냈고 가족구성권 외에도 노동, 교육, 보건 등의영역에서 다각도로 진보를 이뤄냈지만,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 당 내외부에서 반대 의견을 의식해 주춤할 때에는 진보의 속도도 덩달아 느려졌다.

    바첼레트 정부에서 연립여당 역할을 한 좌파 정당 연합체인 콘세르타시온(Concertación)와 콘세르타시온의 후신인 신다수파(Nueva Mayoría)에서는 예상 외로 동성 간 가족구성권 입법에 적지 않은 반대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바첼레트 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듯 2기 정부가 출범할 때에는 1기 정부 때와 달리 즉각적인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해 선을 그으며 “사회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는 수사를 구사했다.

    1기 정부 당시에 시민결합 법을 국회에 상정한 피녜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보수 정당의 대통령으로 시민결합 법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결국 연립여당 내부에서 일어난 반발에 눈치를 봤고 이 눈치보기는 2기 정부까지 이어졌다. 17년 대선 운동 당시 동성결혼 법제화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고 당선 직후에는 차별적인 발언으로 선을 긋기도 했다. 동성결혼 법안이 수년 간 공회전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피녜라 대통령의 곁에서 동성결혼 법제화 진척에 큰 영향을 미친 살라스 전 보좌관이 언론 인터뷰 내용과 피녜라 대통령의 연설 발췌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살라스 전 보좌관은 대통령 스스로의 의지를 강조했다. 라테르세라’와 한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설득을 한 게 아닙니다. 대통령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칠레에 진일보가 필요하다는 확신에 도달한 겁니다. 대통령은 이런 중요한 결정을 보좌관 한 명 때문에 내리지 않아요. 오히려 (동성결혼 법제화라는) 의제를 추진해야겠다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겁니다.”라고 말했다.

    연례 연설문 일부 캡처


    저는
    1기 정부에서 시민결합법을 추진했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자유라는 가치에 있어 더 깊이 나아갈 필요가 있으며, 이는 사랑할 자유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룰 자유를 포함합니다. 또한 두 사람 사이 존재하는 모든 사랑과 애정의 관계가 가져야 할 존엄성의 가치에 있어서도 깊이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자유와 존엄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평등한 결혼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칠레 정부는 오늘, 국회에서 수년 동안 계류하고 있는 혼인평등법을 긴급히 재추진할 것을 발표합니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당연한 존엄성과 보호를 누리며, 자신의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사랑하고 가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담당자: 미겔
    *최초 게시: 22.03.01.

     

     

     

    [이하 참고자료 목록]

    (글로 된 참고자료): 모든 자료의 마지막 확인 날짜는 22.02.28.
    -(2017). “Hijos de Sebastián Piñera se declaran de centroizquierda y a favor del matrimonio igualitario”. El Dinamo. 17.11.27. <https://www.eldinamo.cl/nacional/Hijos-de-Sebastian-Pinera-se-declaran-de-centroizquierda-y-a-favor-del-matrimonio-igualitario-20171127-0001.html>.
    -(2017). “La campaña da para todo: hijos de Piñera dicen ser de "centro izquierda"”. El Mostrador. 17.11.28. <https://www.elmostrador.cl/noticias/pais/2017/11/28/la-campana-da-para-todo-hijos-de-pinera-dicen-ser-de-centro-izquierda/>.
    -(2018), “Rolando Jiménez participa en debate que impulsa la Fundación Futuro con docentes de todo el país”. MOVILH. 18.07.27. <https://www.movilh.cl/rolando-jimenez-participa-en-debate-que-impulsa-la-fundacion-futuro-con-docentes-de-todo-el-pais/>.
    -(2021). “Cadem: 74% de los encuestados está de acuerdo con el matrimonio igualitario”. Cadem. 21.06.07. <https://www.t13.cl/noticia/nacional/cadem-74-encuestados-esta-acuerdo-matrimonio-igualitario-07-06-2021>.
    -(2021). “Presidente Piñera reveló que sólo “algunos” ministros sabían que daría urgencia al matrimonio igualitario“. CNN Chile. 21.06.02. <https://www.cnnchile.com/pais/entrevista-sebastian-pinera-cuenta-publica-matrimonio-igualitario_20210602/>.
    -(2021). “Pulso Ciudadano: Un 55,5% de los chilenos están de acuerdo con el proyecto de ley de matrimonio igualitario”. AIM. 21.06.14. <https://www.aimchile.cl/2021/06/14/socios/pulso-ciudadano-un-555-de-los-chilenos-estan-de-acuerdo-con-el-proyecto-de-ley-de-matrimonio-igualitario/>.
    Gallardo, Rosario(2019). “Chadwick insiste en que gobierno es partidario de "matrimonio heterosexual" y llama al Congreso a respetar las urgencias”. La Tercera. 19.09.10. <https://www.latercera.com/politica/noticia/chadwick-insiste-gobierno-partidario-matrimonio-heterosexual-llama-al-congreso-respetar-las-urgencias/817731/>.
    Catena, Paula(2020). “¿Giro del gobierno? Piñera plantea a ministros revisar postura sobre matrimonio igualitario”. La Tercera. 20.10.16. <https://www.latercera.com/la-tercera-pm/noticia/giro-del-gobierno-pinera-plantea-a-ministros-revisar-postura-sobre-matrimonio-igualitario/TN5KPGEWWFC6ZMYQFGZGOUV5D4/>.
    Gimberg, Lucile(2021). “Chile: sorpresivo impulso del presidente Piñera al matrimonio igualitario”. RFI. 21.06.02. <https://www.rfi.fr/es/programas/noticias-de-am%C3%A9rica/20210602-chile-sorpresivo-impulso-del-presidente-pi%C3%B1era-al-matrimonio-igualitario>.
    Jara, Alejandre & Soto, Claudia(2021). “Piñera anuncia urgencia a proyecto de matrimonio igualitario: “Debemos profundizar sobre el valor de la libertad, incluyendo la libertad de amar””. La Tercera. 21.06.01. <https://www.latercera.com/politica/noticia/pinera-anuncia-que-pondra-urgencia-a-proyecto-de-matrimonio-igualitario-debemos-profundizar-sobre-el-valor-de-la-libertad-incluyendo-la-libertad-de-amar/NH4JWFAF5JB4FE3SVL474AAONY/>.
    Martínez G., Daniel(2014). “Cristóbal Piñera Morel: "El mayor legado de mi papá fue cambiarle el rostro a la derecha chilena"”. El Dinamo. 14.02.17. <https://www.eldinamo.cl/pais/Cristobal-Pinera-Morel-quotEl-mayor-legado-de-mi-papa-fue-cambiarle-el-rostro-a-la-derecha-chilenaquot-20140217-0035.html>.
    Mora, Sebastián(2019). “Andrés Chadwick deja el Ministerio del Interior tras duros cuestionamientos por crisis social”. 24horas. 19.10.28. <https://www.24horas.cl/politica/andres-chadwick-renuncia-al-ministerio-del-interior-tras-duros-cuestionamientos-por-crisis-social-3688728>.
    MOVILH(2021). MOVILH, LOGROS DE 30 AÑOS. 21.06.26. <http://movilh.cl/archivo/content/logros-30-anos-del-movilh/>.
    Pérez, Guillermo(2021). “Columna de Guillermo Pérez: ¿La derecha despertó?”. CNN Chile. 21.07.01. <https://www.cnnchile.com/opinion/columna-de-guillermo-perez-la-derecha-desperto_20210701/>.
    Wilson, José Miguel(2021). “Matrimonio igualitario: seis impulsores y detractores de una ley que partió con una fallida ceremonia ante el Registro Civil”. La Tercera. 21.11.30. <https://www.latercera.com/la-tercera-pm/noticia/matrimonio-igualitario-seis-actores-clave-de-una-ley-que-partio-con-una-fallida-ceremonia-ante-el-registro-civil/BNBZNAFBTBBINPJT5IGL4IK2NA/>.

    (음성으로 된 참고자료): 모든 자료의 마지막 확인 날짜는 22.02.28.
    -(2021). “Condiciones que permitieron el avance del matrimonio igualitario”. Pauta. 21.12.10. <https://www.pauta.cl/podcasts/reunion-de-pauta/condiciones-que-permitieron-el-avance-del-matrimonio-igualitario>.
    -(2022). “Óscar Rementería: "El matrimoni igualitari no és la victòria màxima"”. Catalunya Radio. 22.01.18. <https://www.ccma.cat/catradio/alacarta/ja-mentens/oscar-rementeria-el-matrimoni-igualitari-no-es-la-victoria-maxima/audio/112261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