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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최초의 성소수자 노인 요양시설: “동성애혐오는 시간이 흐른다고 사그라지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더라고요.”
    스페인어권/스페인 2022. 1. 16. 19:58
    기사 원문에서 수집한 사진. 안토니오 산체스 씨와 파비오 카페요 씨.

    ‘12월 26일 재단’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고령의 성소수자를 위한 요양시설 개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고령의 성소수자들은 더욱 큰 소외와 배제의 위험에 놓여 있다.

    ◎ 읽기 전에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스페인에서는 1939년부터 1975년까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철권을 휘둘렀으며 이 시기 동안 많은 성소수자(당시 표현으로는 ‘동성애자’)들이 반사회적인 인물로 취급받아 고초를 겪었습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에는 1978년까지 3년에 걸쳐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역자 남김)


    스페인 마드리드 비야베르데에 가면 마드리드 남부 지방 특유의 붉은 벽돌과 녹색 차양막 사이로 건물 옆면이 보라색으로 칠해지고 하얀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을 찾을 수 있다. 본래 비야베르데 경로당 겸 요양원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이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건물 외벽에 나붙은 종이에는 휘날리는 먼지와 톱밥 사이로 “고령 성소수자 특화 요양시설 보수 공사 중”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 건물은 10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지난 2018년 공사 신청이 접수됐다. 이 건물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한 사람은 페데리코 아르멘테로 씨다. 아르멘테로 씨는 사회 교육자인 동시에 고령의 성소수자를 위한 돌봄을 제공하는 12월 26일 재단(Fundación 26 de Diciembre)의 회장이다. 아르멘테로 씨는 “어쨌든 우리는 독재정권의 탄압, 에이즈의 낙인 등 온갖 가능한 모든 재앙을 겪어온 집단이에요. 그리고 마침내 호시절이 오나 싶을 때가 되어 보니, 우리는 나이가 들어버렸고 이 ‘나이’라는 결정적인 요인은 우리를 망각 속으로 빠뜨리덥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래서 성소수자에 특화된, 강조컨대 성소수자‘만’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고 다만 성소수자에 특화된, 공공 요양시설을 만든다는 발상은 저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일인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에요. 누군가에게는 뚱딴지 같은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요. 동성애혐오(homofobia)는 시간이 흐른다고 누그러들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더라고요.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내내 도망쳐 나왔던 벽장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살라고 하는 건, 인생 최악의 패망이에요.”라고 이야기했다.

    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스페인 전국민의 19.7%인 약 900만 명 이상은 65세 이상 인구이다. 또 전국민의 12%는 자신을 성소수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페인의 65세 이상 성소수자는 100만여 명 정도인데, 이들은 다시금 소외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아르멘테로 씨는 “우리 나이대 사람 대부분은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했어요. 게으름뱅이, 범법자, 정신병 환자 취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에이즈가 우리의 죄악을 벌하는 신벌이라는 얘기도 들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르멘테로 씨는 마드리드에서도 보수적인 동네인 엔트레비아스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아르멘테로 씨의 어머니는 1970년 제정된 ‘사회적 위험과 재활에 관한 법률’*1)을 이유로 아들을 경찰에 신고했다. 아르멘테로 씨는 “저는 저의 성적지향을 잊기 위해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했어요. 그리고 5년 만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명령으로 저를 포함해 동성애자였던 모든 사제들은 쫓겨났어요.”라고 회고했다. 이후 아르멘테로 씨는 스페인 갈리시아 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야영장 관리인으로 일하던 여성인 롤리타 씨를 알게 되었다. 아르멘테로 씨는 롤리타 씨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독녀가 태어났다. “스스로를 속였어야 했던 것 같아요. 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대신 묻어왔던 거죠, 36년도 넘는 시간 동안.” 아르멘테로 씨는 치료를 받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했고 마드리드로 돌아와 지금은 파트너인 이노센테 아과도 씨와 함께 12월 26일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의 이름인 ‘12월 26일’은 스페인에서 동성애가 비범죄화된 1978년 12월 26일을 기념하고 있다.

    아르멘테로 씨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특별한 사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 세대가 겪어온 삶의 표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났다고 한들 우리의 정신건강은 어떤 영역에서는 끔찍하게 나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또 마땅히 누렸어야 할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텐데, 이 사람들도 적어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평화는 누려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한 아르멘테로 씨는 고령의 성소수자들을 위한 요양시설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 요양시설은 60여 칸의 방, 카페, 도서관, 다용도실, 그리고 장례식장을 갖출 예정이다. 또 고령의 성소수자를 위한 요양시설로는 세계 최초 수준이다. 건물 공사에 필요한 지원금 조달에 문제가 없다면 2022년 중반에는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요양시설은 아르멘테로 씨의 오랜 꿈이 이뤄지는 곳이다. 12월 26일 재단은 과거에 이미 모스톨레스 시에 있는 체마 로아 요양원을 성소수자 요양시설로 운영하려다가 좌절된 뼈아픈 경험이 있지만, 성소수자 요양시설에 대한 긴급한 사회적 필요성에 다시금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보티 가르시아 로드리고 스페인 평등부 성적다양성 및 성소수자 인권 총괄국장은 “모든 어르신들은 자신의 성적지향 혹은 젠더정체성을 이유로 차별과 부정적인 시선, 도 넘는 장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전혀 들지 않는 환경에서 돌봄을 제공받아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가르시아 로드리고 총괄국장은 스페인에서 전설적인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현재는 스페인 중앙 정부부처 중 하나인 평등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기사 원문에서 수집한 사진. 비올라 사울리테 씨.

    새로운 성소수자 요양시설에 가장 먼저 입주할 사람은 12월 26일 재단 내 가장 베테랑 활동가인 비올라 사울리테(라트비아, 65세) 씨다. 사울리테 씨는 마드리드 시내에서 얼굴이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사울리테 씨는 수년 동안 마드리드 중심가인 그란비아 대로에서 동냥을 해왔고 특히 시내 한복판에 있는 텔레포니카(스페인 1위 규모 통신사) 사옥 근처 모퉁이에서 머물렀다. 사울리테 씨는 마음 속 깊이 배척감을 체화했고 이 때문에 자원봉사자들도 초기엔 사울리테 씨에게 쉬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동안 겪은 일들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사울리테 씨는 근심 가득한 눈빛을 지을 뿐이다. 사울리테 씨는 극빈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오만 일에 쫓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부터 돌을 던지는 사람까지 각종 학대를 당했다. 아르멘테로 씨는 “사울리테 씨는 학대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어요.”라고 말했다.

    아르멘테로 씨의 말에 동의한 사울리테 씨는 더듬거리는 라트비아 억양으로 분명히 이야기했다. “저는 그냥 평온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발, 그저 그거뿐이에요.” 사울리테 씨가 요양시설 생활에서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키보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울리테 씨의 사례는 아르멘테로 씨가 가진 비전의 모범 사례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겨우 견뎌온 사람이, 누군가가 커피 한 잔 사겠다는 말이 나를 독살하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살아온 사람이 오늘 사랑받는다고 느낀다면, 그러면 ‘헛수고’라는 건 없는 겁니다.”

    기사 원문에서 수집한 사진. 안토니오 루이스 씨.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안토니오 루이스(스페인 마드리드, 64세) 씨도 이곳으로 이주할 예정이다. 루이스 씨는 바로 이곳 비야베르데에서 태어나 5살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견뎠냐고요? 잘 견뎠어요. 숨기고 사는 것도 ‘잘’의 범위에 포함된다면요.” 부모님과 소통하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가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다거나 성교육을 안 받은 건 아니에요. (동성애자라는 건) 당연하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저는 항상 형제들이 여자친구를 만나는 모습을 봤고 줄곧 ‘안토니오 쟤는 누구랑 만나려나’ 같은 소리를 들어왔어요. 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파트너와 함께 떠나는 것이었고, 이건 (가족의) 분열로 이어졌어요.”

    루이스는 이 시기를 결혼의 행복과 소외감이 혼합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1981년 스페인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유입되었고 스페인 보건부는 이후 40년 동안 현재까지 6만여 명이 HIV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루이스 씨는 “당시 우리는 독재정권의 종말을 마주하고 있었고 마침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합법이 되었기 때문에 흥분의 도가니였어요. 1979년부터 우리는 덜 두려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우리의 작은 동굴에서 나서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에이즈가 찾아왔죠.”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1987년 에이즈를 진단받았다. “당시에 저는 2명의 남자와 같이 살고 있었고 그 중 하비에르라는 친구가 우리한테 검사를 해보라고 했어요.” 루이스 씨는 당시 마드리드 국왕 병원(현 카를로스 3세 병원)에 관련 정보가 불충분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하비에르는 얼마 뒤인 1992년에 죽었어요. 호세와 나는 서로 덕분에 살아남았죠. 누군가는 90년대에 3인 관계라니, 하며 놀라겠지만, 폴리아모리가 오늘날에서야 떠오른 이슈라고 생각하다니, 참 골려먹기 쉬운 사람이겠어요.”

    루이스 씨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덕분에 HIV와 공존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12만여 명이 이 약물을 처방받았다. 루이스 씨는 에이즈 환자에 대한 낙인이 완화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지난 21년 9월 마드리드 추에카 지역에서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시위를 하며 외쳐댄 “에이즈 환자들은 우리 동네에서 나가라!”라는 문구는 여전히 루이스 씨의 머릿속에서 울려대고 있다. 루이스 씨는 “이런 행동은 매일 매일 있어요. 지하철에서도, 우리 동네 길거리에서도 겪었어요. 저 자신은 어릴 적에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거들먹거리는 체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발자취 위에 서 있는 세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권을 잃어버리고 나서라야 그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경고했다.

    이 요양시설에는 재단과 수년 간 함께한 얼굴들도 입주할 예정이다. 치코테 씨, 칸다 씨, 란델스 씨 이 세 사람은 요양시설의 방 한 칸을 공유할 예정이다. 이 세 명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 칸다(스페인 마드리드, 72세) 씨는 살라망카 시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칸다 씨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13살 때 깨달은 성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제가 1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법학을 공부해서 나중에 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아버지의 부재와 저의 성정체성은 제 삶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담스 학원(스페인 고시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충분히 편안한 삶을 얻었지만 그 다음 순간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칸다 씨는 1985년 HIV 감염을 진단받았고 스페인 내 초기 HIV 감염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칸다 씨는 “가족한테 이야기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낙인은 온 인생을 쫓아다녔어요. 상황이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우리가 살았던 순간이 잊힌 건 아닐지 두렵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기사 원문에서 수집한 사진. 루이스 칸다 씨.

    칸다 씨의 룸메이트인 호세 마리아 치코테(스페인 쿠엥카, 73세) 씨는 500명이 거주하는 작은 동네인 오사델라베가에서 자랐는데 같은 학교 학생들로부터 지속적인 따돌림을 당했다. “저는 모든 학생들의 장난감이었고 그 아이들은 저를 다루고 싶은 대로 다뤘어요. 펠라치오를 강요하거나 춤을 추게 했고 나중엔 달음박질치면서 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어요. 부모님이 저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반대였죠.” 치코테 씨는 과거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집에 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얘기했지만 제가 마주한 건 마치 저를 티푸스 환자 취급하듯 대하는 아버지였어요.”

    치코테 씨는 가능한 한 빨리 마드리드로 이사했다. 마드리드 안톤마르틴 지역에 터를 잡고 창고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80년대는 낙관주의와 변화의 기대를 몰고 온 시대였다. 45세의 치코테 씨는 파트너를 만났고, 치코테 씨의 파트너는 작년 심근경색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12월 26일 재단은 저한테는 기적처럼 찾아왔어요. 이런 고독함만을 가지고는 남은 삶 동안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거든요.” 치코테 씨는 말기 암을 앓고 있고 어쩌면 새로운 요양시설로 이사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살 수 없게 된다면, 저는 적어도 저라는 존재가 고통의 유산인 동시에 희망의 유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평화롭게 삶을 마칠 권리가 있어야 해요.”

    안토니오 산체스(스페인 세비야, 74세) 씨와 파비오 카페요(이탈리아, 51세) 씨도 새로운 입주민이 될 예정이다. 이 둘은 2017년 9월 재단 행사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지난 7월에는 결혼을 했다. 카페요 씨는 산체스 씨를 설명하며 “이 사람이 가진 카리스마의 일부는 그 많은 해를 독재정권 하에서 살아남은 데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 경험 때문에 카페요 씨는 제 나이 또래에는 없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산체스 씨는 “사랑에 빠지기에 늦은 시기는 없어요. 이 메시지가 모든 동성애자들에게 닿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산체스 씨는 자신의 동성애를 ‘치료’받기 위해 전기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카페요 씨와의 결혼은 산체스 씨에게 있어 두 번째 결혼이자 남자와 한 첫 번째 결혼이다.

    산체스 씨와 카페요 씨의 사연은 ‘게이들의 고독이라는 전염병’(epidemia de soledad gay) 속에서 얼마 되지 않는 희망의 오아시스다. 12월 26일 재단에서 자원봉사자로 있는 후안 카를로스 아기아르(쿠바 아바나, 68세) 씨는 이런 고독의 원인을 젊음에 대한 선망에서 찾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많은 게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에요. 모든 게 신체적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 끊임없는 꾸밈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게이들이 나이를 들어가면서 새치가 나기 시작하고 그늘진 삶에서 심리적인 잔병치레를 하게 되는 걸 관찰하고 있으면,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끔찍한 우울증과 자기애 결여로 변화하는 걸 보게 돼요. 노화를 인생의 말기가 아닌 그저 마지막 단계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이 요양시설은 그저 벽장 속에서 피해자로, 배제된 자로, 혹은 단순히 지워진 자로 살았었던 모든 이들을 위한 정의로운 공간이 될 겁니다. 삶을 위한 가정이자 다시는 결코 어둠 속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집인 겁니다.”

    기사 원문에서 수집한 사진. 산체스 씨와 카페요 씨.


    *역주
    1) ‘사회적 위험과 재활에 관한 법률’(Ley sobre peligrosidad y rehabilitación social)은 프랑코 독재정권 당시에 ‘반사회적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죄목 중에는 동성애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형벌로는 최소 벌금형부터 최대 5년의 징역 혹은 ‘정신재활’을 규정하고 있다.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되돌아오면서 이 법은 점차 개정되어 갔고 1995년 완전 폐지되었다.

     
     

    (출처)
    작성: Mario Ximénez, El País (스페인)
    기사 원문 작성일: 22.01.01.
    기사 원문 제목: “La homofobia no mengua con la vejez, al contrario”: las historias detrás de la primera residencia LGTBI española
    기사 링크: https://elpais.com/icon/2022-01-01/la-homofobia-no-mengua-con-la-vejez-al-contrario-los-supervivientes-que-ocuparan-la-primera-residencia-lgtbi-espanola.html

    (번역)
    담당: 미겔
    최초 게시: 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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